사월 첫째날 이 층짜리 호텔 일 층 로비에는 리셉션 데스크 대신 풀 바가 있어 이백이 다시 몇 호에 체크인을 하려 한다 하면 아래로 눌러 여는 문고리 얼굴을 한 바텐더가 투명한 플라스틱 컵과 도넛 하나와 얼굴 지퍼가 달린 전신 비닐 옷을 주지. 분명히 기억해. 그 얼굴의 움직임 말고, 그 도넛의 맛을 말이야. 바텐더에게 도넛을 맡기고 주섬주섬 질긴 옷을 껴...
‘계산기’로 영상을 보다가 문득 어떤 익숙한 눈썹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학생 때 알고 지내던, 언제나 배낭을 메고 다니던 그 아이. 막상 지퍼를 끌러 보면 꼭 필요한 것 몇 가지만 단출하게 들어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다. 매일 2교시가 끝나면 그 아이 반에 가서 오늘은 어떤 물건을 가져왔는지 구경했다. 필요에 따라 우산이나 체육복, 작은 연필깎이 등이 추...
숲을 나온 숲 안개는 새삼스럽지도 않은 모세 혈관 존재치 않았던 명(名)을 붙잡고 오르내리며 큰 원을 그려 왔다 이제 다시는 젖은 흙에 배를 깔고 풀숲을 뒹굴지 못하리라 는 생각도 대의를 위해 이름을 위해 큰 원을 그리며 흩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은 특징조차 될 수 없었으나 몸을 한껏 부풀려 유영할 때면 어둡고 축축한 숲에서 만난 ‘얘’를 이름을 준 애를...
부재중 전화 2통 - 베일리(2)베일리10:47AM 지금 공항?10:47AM 뭐 잊은 건 없지? 확인해 봐10:48AM 확인했어? 필요한 거 있으면 내가 갖다줄게10:50AM 첫 휴가 잘 다녀와 비행기에서 내리면 연락하고!10:51AM 즐거운 여행~!! 비행기가 출발하길 기다리며 휴대폰을 들여다보자 온통 한 사람의 연락이었다. 떠나 오기 일주일 전에 대뜸 ...
마치 금붕어 뜨기 같아. 다 거짓말이잖아. 인어를 본 게 분명했다. 바다가, 먼 수평선이 더욱 멀게 부풀어올라서.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다. 파란색은 제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색이라지. 그게 바로 사랑이었다. 목에 가시가 돋아난 것처럼. 인어의 비늘이 비쳐보이는 수면을 흐트려놓고, 낮에 뜬 달, 조용하고 또 희미하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그때 그날 그곳...
수박이나 포도 같은 것의 씨를 투투 뱉어내는 것 같이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소리가 비슷해요. 누구는 키보드 소리가 꼭 비 오는 소리 같다고 하는데요, 사실은 씨앗 뱉기입니다. 이걸 다 뱉지 않으면 질긴 뿌리에 휘감겨서 초록빛으로 질려버리고 말 거예요. 초록 참 예쁘죠. 여름 하면 초록 아님 파랑 아님 노랑 아님 빨강인데. 그런 계절이니까 저도 조금은 원색적...
신도 종교도 없던 우리가 문학을 숭배하게 된 것은, 서로를 숭배하고 싶은 열망의 명목이었다. 무언가를 섬기지 않고서는 넘치는 젊음의 열기 따위를 소모할 수가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주변을 가득 메우며 세상을 이루는 것들이라곤 하나같이 공허하고 세속적일 뿐이라서, 우리의 예민하고 불안정하지만 더없이 맑은 정신세계로 비추어 봤을 때에 숭배의 대상은 서로뿐이었다...
또 다시, 찬란이 흘러넘치는 여름이었다. 기꺼이 남용되는 뜨거운 빛 아래 소녀가 있었다. 하필이면 사랑이 사람을 물들이는 세상에 태어나 요즘은 멋쩍게 머리카락을 꼬는 일이 많다. 바로 옆의 제 오랜 친구가 돌연 머리를 푸른색으로 염색한 것은 말하자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 애의 붉은 더벅머리를 오랫동안 봐 왔으나, 연하늘색도 제법 어울렸다. 둘의 머리색은 거...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많은 분이 저를 보러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굉장히 많이 계시네요. 저를 5월 특집 ‘어린 시절 추억의 인물’의 강연자로 불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부분 저를 ‘생강빵 아이’라고 알고 계실 텐데요, 제 진짜 이름은 진저입니다. 좀 뻔하죠, 하하. 아주 직관적이에요. 이 이...
소리 없이 눌리는 스위치 그건 아이의 등 뒤에 달려 있었다 방금까지 방에는 왁자하게 시끌시끌하게 과자며 만화책이며 딱지며 구슬이며 모든 것을 아직도 벌여둔 채로 모두가 정리를 즐기지 않았던 탓이다 배웅하는 등 뒤에 파란 버튼으로 된 몇 개 잃고 또 몇 개 따 오는 일 새로 손에 넣은 구슬 속에는 세상이 뒤집혀 맺힌다 뒤집혀서 둥글게 말려버린 세상이다 닥다글...
플라네타리움. 천체 투영관도 안 되고 플라네타륨도 안 된다. 플라-네-타-리움. 자모음 하나하나가 공기를 막았다 터트렸다 하며 흐른다. 그 흐름이 꼭 시간의 경과 같고 별자리의 이동 같다. 우리가 계절별 별자리라고 부르는 것은 그 계절에 하늘의 중심부에서 볼 수 있는 별자리를 말하는 거예요. 봄철 별자리라고 해서 여름에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거...
안녕. 당신이 세상을 떠난 뒤 처음으로 편지를 써. 그간 누구에게도 편지 같은 건 쓴 적이 없거든. 벌써 10년째네. 다름이 아니라 브랫이 어젯밤 생을 다했어. 당신의 사랑스러운 마코앵무. 브랫은 10년간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고 매일 불러주었어. 블랑카, 보고 싶어. 블랑카, 보고 싶어, 하고. 그래, 블랑카. 나는 당신의 앵무새 때문에 10년간 하루도 ...
물 하(河), 때 시(時). 물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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